바로가기 삭제, 혹은 언인스톨

1. 그것은 매우 우발적이고도 계획적인 사건이었다.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것 뿐이야, 라고 전화를 끊은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 날도 밤늦게 헬스장에서 돌아와 방청소를 하며 그녀와 통화를 했다. 통화는 내내 유쾌했다. 소소했고, 일상적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새 방바닥에 누워 핸즈프리 마이크를 입술 바로 앞까지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럼 우리 그냥 오빠-동생하는 게 어떨까. 깔깔거리며 웃던 일련의 대화 후에 헤어짐의 말들이 자연스럽게 오고 갔다. 생경하고 부조리한 말들이었다. '오빠-동생 관계로의 전환'이라는 합의의 구체적인 내용조차 전형적인 이별의 모습과는 달랐다. 울면서 싸운 적이 한 번 없는 우리의 헤어짐은 그저 고요하고 담담했을 뿐이다. 말은 안했지만 이별조차 저 혼자 집어삼켜 삭히겠다는 그녀의 익숙한 희생 정신, 혹은 마조히즘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당신 정말 끝까지 이럴꺼야? 너무 착해서 자꾸 속상한 그녀에게 나는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합의 이후 우리의 대화 또한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즐거웠다.

2.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고 하여 집에서 혼자 다운받아 본 기억이 있다. 레트는 스칼렛을 좋아했으나 애슐리를 향한 스칼렛의 마음에 지쳐 그녀를 떠난다는 것이 영화 속 애정관계의 주된 스토리 라인이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오래된 에세이집에서 '레트는 스칼렛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쓴 적이 있다.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한다. 레트는 스칼렛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지독한 에고이스트였을 뿐이다. 에고이스트는 자기 자신 이외에 그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이 사실은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가진 골수 에고이스트인 나에게 몇 달 간 시달린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전역 전후로 두 달씩 총 네 달, 인생의 전환점에 선 이십대 중반 남자가 가장 정신없을 시기에 그녀는 내 곁에 있었다. 자신에게만 애정을 쏟기에도 바빴던 나에 대한 그녀의 인내와 희생이 우리 관계 밑에 구조적으로 깔려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감당할 수도 없었다. 구조화된 착취관계를 더 못 견뎌하던 것은 그녀보다 오히려 내 쪽이었다. 어떤 블로거의 말처럼 마조-마조 관계의 흥미로운 측면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는 자신을 포기할 수도 없는 '에고이스트'에다가 남에게 해를 끼치기보다 차라리 내가 손해보고자 하는 '마조히스트'였다. 나를 희생할 수도 없고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힐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천사같은 그녀에 대해 할 수 있는 선택은 한 가지였다. 차라리 내가 에고이스트에 더 잘 어울리는 사디스트였다면 어땠을까. 우리의 연인 관계는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까.

3. 헤어진 다음 날 우리는 만났다. 항상 가던 레스토랑의 언제나 앉던 자리에 앉아 자주 먹던 메뉴를 시켰다. 빌딩 위의 현수막이 느리게 흔들렸고 초가을을 배경으로 새들이 허공을 비껴 날았다. 오빠-동생이라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편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고, 웃었다. 다만 중간에 그녀가 카페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의 제목을 물어서 내가 브라운아이드소울의 <정말 사랑했을까>라고 대답해주었을 뿐이다. 그러다 나는 너스레 떨며 책상 위에 놓여 진 그녀의 과제노트를 집어 와 펼쳐 보았다. 나 네 글씨 처음 봐. 내가 말했다. 예전에 선물한 책에 편지 끼워 두었는데 그거 못 봤단 말이야? 그녀가 대답했다. 책에 편지를 끼워 선물하는 여자와 제가 읽을 책이나 먼저 읽느라 편지를 발견하지 못한 남자. 그것이 우리의 관계였다. 집으로 돌아와 책들을 뒤져 엽서 한 장을 찾아내었다. 흐린 날 베네치아 수면 위로 둥근 종탑들이 솟아있는 그림의 뒷장에 그녀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이야기를 써두었다.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 함께 고향의 길을 걷고 싶다는 그녀의 작은 청을 들어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parting이 아니라 conversion이야. 프로그램 제거가 아니라 그냥 바로가기 삭제일 뿐이라고." 내가 설득하려고 했던 이별의 모토에 충실한 우리는 오빠-동생의 관계로 전환하는 데에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이렇게 고향의 거리를 같이 걷는 미래의 작은 문제 하나에도  우리의 '관계성'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녀를 인간적으로 참 많이 아끼는 나는 어쩌면 무언가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만났던 어떤 여자보다 성숙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를 내 울타리 안에서 놓치기 싫은, 지극히 에고이스틱한 욕구에 다름 아닐 것이다. 나는 아카시아숲이 보이는 내 방의 작은 창가로 가 황지우의 <몹쓸 동경>이라는 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가끔 나는 사랑한다 소리내어 말하고 한숨을 쉬곤 해요'라고 쓴 그녀의 편지를 두 번째 읽었다.

by 보클레어 | 2007/09/26 19:13 | 삶-비망록 | 트랙백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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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09/26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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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09/26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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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09/26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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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09/27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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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09/27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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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09/29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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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10/04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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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10/0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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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랭보 at 2007/11/13 10:00
어디 가셨나?
Commented by 달빛시 at 2008/02/23 22:36
이 곳이 다시 인스톨 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서 돌아오세요. :)
Commented at 2009/07/19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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